2023년 7월, 미얀마의 우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나는 동료와 함께 라카인주 부티다웅의 한 실향민 캠프에서 트웨 아줌마를 만났다. 아줌마의 가족은 2019년 미얀마군과 라카인주의 무장단체인 아라칸군 사이의 전투로 집과 마을을 잃고 국내 실향민 캠프에서 작은 대나무 집을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나는 국경없는의사회 미얀마의 인도적 지원 매니저로서 트웨 아줌마와 같은 라카인주 환자들이 의료 접근성에 어떤 장애가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영어와 라카인어가 가능한 로힝야 출신 동료가 옆에서 통역해줬다. 준비한 질문의 반 정도가 진행되던 때였다. 문득 어디에선가 익숙한 멜로디와 가사가 들렸고, 나도 모르게 “어, 이 노래 아는 노래인데?”라고 중얼거렸다. 알고 보니 트웨 아줌마의 10대 딸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케이(K)팝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3년 새 최소 6천 명 사망… 멈출 줄 모르는 총성

마침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묘한 우연에 우리 세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나는 미얀마 라카인주의 실향민 캠프에서 로힝야 동료와 함께 케이팝을 배경음악으로 환자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날은 잊지 못할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의 빗소리, 그 사이사이 두런거리면서 진행했던 인터뷰, 또 우기의 힘든 캠프 생활 한가운데서도 잠시나마 함께 웃었던 그 순간. 모든 것이 특별했다.

나는 당시 라카인 북부의 동료들과 함께 약 한 달 동안 많은 로힝야 환자와 라카인 환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양곤으로 돌아왔다. 다시 라카인을 방문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환자들과 동료들을 다시 볼 수 없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2023년 11월 라카인주는 또 다른 분쟁의 시작을 맞이했고, 인도적 지원 환경은 급속히 악화하고 말았다. 2023년 10월 미얀마 동부 샨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 무장충돌 때문이었는데, 라카인을 포함한 많은 다른 주에서도 서로 다른 분쟁 당사자들이 본격적인 전투에 가담하면서 전면전 양상으로 번졌다. 유엔에 따르면 현재 미얀마에서는 300만 명 이상이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이 됐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미얀마에서는 6천 명 넘는 민간인이 사망했고1, 의료시설은 1천 군데 넘게 공격당했다2. 국경없는의사회를 포함한 많은 인도주의 단체들이 지원이 시급한 지역에 접근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였다.

국경없는의사회가 활동하던 현장에서도 분쟁이 격화했고, 2024년 4월 국경없는의사회 부티다웅 사무소와 재고물품 및 의약품이 분쟁 속에서 화재로 전소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당시 집 200여 채가 불에 타고 수천 명이 폭력으로 사무소 건너편 장소에 피란하고 있었는데, 그 사태의 여파가 사무실이 전소하는 피해로 이어진 것이다. 국경없는의사회 동료들은 더는 이 지역에서 그 어떤 방식의 인도적 지원 활동도 할 수 없게 됐고, 자신들의 안전까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미 이번 분쟁 격화 이전부터 의료시설이 부족해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소와 인근 2차 병원으로의 응급전원 서비스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환자들은 이제 최소한의 의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총체적 의료공백에 노출돼 있다. 간단한 약 처방으로 나을 수 있는 질환을 겪는 아동도, 제왕절개 수술이 필요한 산모도 이제는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의료시설은 불타고, 진료할 사람은 위험하다

트웨 아줌마의 집에서 함께 웃었던 그날로부터 1년이 지났다. 나는 아줌마의 가족, 라카인의 실향민 환자들, 그리고 소수민족으로서 이동의 자유 없이 삶을 이어가며 국경없는의사회 이동진료에 의지하던 로힝야 환자들이 어디로 피란했는지 알 수 없다. 국경없는의사회 동료와 가족들도 대부분 피란길에 올랐지만, 모두 무사한지, 아픈 곳은 없는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은 구할 수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2024년 3월, 한 동료가 마지막 통화에서 “앞으로 1시간 이내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다”(I am not sure if I would survive in next hour)고 한 말이 지금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미얀마의 분쟁과 고통은 최근 시작된 것이 아니다. 2021년 2월 군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각지에서 불안정한 상태가 이어졌고, 2023년 10월 말 소수민족 무장단체들이 개입한 전면적인 전투가 격화된 이후 더욱 심각한 인도적 위기에 직면했다. 라카인주에는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을 겨냥한 폭력에 노출돼 살아온 소수민족인 로힝야 사람들이 분쟁 속 그 어떤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2024년 8월25일은 2017년 약 70만 명의 로힝야 사람이 라카인주를 떠나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로 탈출한 지 7년째 되는 날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라카인주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수십만 명의 로힝야 사람에게는 국경을 넘는 피란의 선택지도 제한돼 있으며, 민간인 사망이 늘어나고 폭력이 격화하는 상황 속에 발이 묶인 상태다. 8월9일 국경없는의사회는 성명을 통해 최근 분쟁으로 부상을 입은 로힝야 환자가 국경을 넘어 콕스바자르로 유입되고 있고, 박격포탄 부상과 총상은 라카인주의 로힝야 사람들에게 닥친 인도적 위기가 더욱 악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국경없는의사회 미얀마 사무소에서 근무 중인 김태은 활동가. 국경없는의사회 제공

분쟁 속 탈출 못한 로힝야족 수십만 명

나는 2024년 7월15일 약 15개월의 활동을 마치고 미얀마를 떠났다. 미얀마를 떠나는 순간에도, 한국에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라카인에서 만났던 많은 트웨 아줌마와 동료들에 대한 소식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만나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 미얀마 전역에서 지금도 피란과 공포 속에 삶을 이어가는 수많은 트웨들에게 하루빨리 인도적 지원이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