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에서 중도층 민심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많은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최근 여야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의 진원지를 출렁이는 중도층에서 찾는다. 정치권에서는 이들 중도층의 여론 향방이 향후 조기 대선이 현실화될 경우 결정적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정당 지지율은 중도층 특유의 견제 심리가 발동한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애초 계엄 직후 ‘여당 심판론’이 우세했다. 여야 지지율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해 12월 14일 직후 최대 격차로 벌어졌다.
이때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을 다수 여론 조사에서 ‘더블 스코어’로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은 곧 변화를 받는다. 12월 말부터 예상과 달리 심판론 반대쪽의 민심이 힘을 받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당의 강경 일변도 전략에 ‘야당 비토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보수층은 결집을 시작했다. 특히 민주당의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탄핵소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 시도 장면을 변곡점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가수 나훈아의 “왼쪽, 니는 잘했나” 발언이 보수층의 공감을 끌어낸 장면이 상징적이다.
이런 지지율 추세는 윤 대통령 구속과 서울서부지법 폭력 사태를 계기로 또 변곡점을 맞았다. 여권 책임론이 다시 부각되면서 보수 결집세는 주춤하고, 야당 지지율은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수 결집에 대한 우려 심리가 작동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 같은 흐름은 중도층 여론의 움직임만 떼어놓고 보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한국갤럽의 12월 3주차 조사를 보면 자신을 중도층이라고 답한 응답자의 46%가 민주당을 지지했고, 국민의힘 지지율은 13%에 그쳤다. 그러나 직후 이뤄진 1월 2주차 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율은 35%로 무려 11% 포인트 하락했다. 반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11% 포인트 오른 24%로 나타났다. 좁혀진 격차는 1월 4주차 조사에서 또다시 벌어졌다. 민주당 지지율이 44%로 치솟았고, 국민의힘 지지율은 24%를 유지했다.
전문가들은 정파·이념에 치우치기보다 사안에 따라 판단하는 중도층의 특성이 드러난 것으로 분석했다. 충격적인 계엄 사태 직후에는 여당에 집중적으로 책임을 물었던 중도층이 민주당의 독주가 부각되는 무렵에는 야당 견제에 힘을 실었고, 윤 대통령 구속에 반발하는 극성 지지자들의 서울서부지법 폭력 사태가 발생하자 여당의 우경화 흐름에 다시 제동을 걸고 나섰다는 얘기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이번 탄핵 국면에서 중도층은 어느 한 진영을 일방적으로 밀어주지 않고, 국면이 전개되는 상황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다”며 “민주당이 강경 일변도로 나갈 때는 여당에 힘을 실었다가도 강경 보수 유튜버들이 기세등등해지자 다시 야당 손을 들어주면서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홍 소장은 이어 “보수나 진보는 폄훼하겠지만 중도층의 이런 균형감각이 탄핵 국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향후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면 중도층이 차곡차곡 쌓아온 양 진영의 득·실점에 대한 평가가 결국은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도층의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무당층’이 줄어드는 현상도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무당층이라고 응답한 중도층은 계엄 직후인 지난해 12월 1주차 34%에서 1월 4주차 25%로 11% 포인트 감소했다. 이는 중도층이 여야 구분 없이 주요 고비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심판자 모드’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무당층 감소 현상은 고민의 시간이 점차 끝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중도층이 장래 정치 지도자 선택을 뒤로 미루는 현상도 주목 대상이다. 한국갤럽의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에서 중도층의 ‘의견 유보’ 응답은 지난해 12월 3주차 34%에서 1월 4주차 41%까지 상승했다. 중도층 절반 가까이가 아직 차기 대선 주자를 고르지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보수·진보층과 비교되는 흐름이다. 보수층에서 의견 유보로 응답한 비율은 지난해 12월 3주차 33%에서 1월 4주차 32%로 큰 변동이 없었다. 진보층에서 의견 유보로 대답한 경우도 같은 기간 21%에서 19%로 소폭 줄어드는 데 그쳤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도층의 ‘이재명 비토’ 현상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차기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인 이 대표지만 중도층에서는 선호도가 오히려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 대표를 장래 정치 지도자로 선호한 중도층은 지난해 12월 1주차 39%에서 1월 4주차 30%로 떨어졌다(인용된 여론조사 결과 관련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이 대표가 중도층에서도 반사효과를 누리는 게 당연한 상황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는 정치 무관심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의 변화, 제3의 인물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 대표가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대표 의제인 ‘기본사회’를 뒤로 물리고 ‘성장’ 우선으로 노선을 전환하겠다고 밝힌 것도 중도층 민심을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많다.
일각에서는 기존에 스스로를 진보·보수층으로 분류하던 사람들의 ‘이탈 현상’이 동반되고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각자 기존에 소속감을 느끼던 진영에 실망감을 느끼고 여론조사에서 정치 성향을 중도층으로 응답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여권 관계자는 “중도층의 특징 중 하나는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인데, 기존에 진보나 보수로 답하던 사람들 중 회의감이나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 결과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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