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10월 14일 홍승무(洪承武) 지사가 타계했다. 경북 상주 이안면 가장리 63번지에서 1882년 6월 28일 출생했으니 향년 52세였다. 그의 마지막 순간은 자결이었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던 홍승무가 귀국했다. 일제 경찰이 그 사실을 알았다. 중국 망명 전인 1910년대에 이미 “동지들을 규합해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여러 차례 구속된(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인물이었으니 철저한 감시와 탄압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
마침내 1933년 10월 15일 일제 경찰이 홍승무 지사를 호출했다. 그는 출두를 거부하고 “동포에게 남기는 호소문, 일제에게 요구하는 공개장, 가족에게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을 찾아 더 살펴본다.
홍승무는 1920년대 중반에는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후 상주로 돌아온 뒤에는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단발 거부에 대한 일제 경찰의 호출장을 받자 (중략) 「동포에게 남기는 호소문」과 「일제에게 요구하는 공개장」 등을 남기고 집 뒤에 있는 소나무에 목을 매 자결하였다.
공훈록의 내용에 없는 ‘단발령 거부’가 나온다. 홍승무 지사는 호소문에서 “일제가 1910년에 우리나라를 강제로 빼앗더니 이제는 강제 단발로 5천 년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을 없애려 한다며 자신의 자결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을 없애려 한” 일제의 상징적 조치였던 것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정 지사들
독립운동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둔 분들의 행동을 자정(自靖)이라 한다. 그런데 포털에서 검색 하면 국어사전에 ‘자정’은 나오지 않고 백과사전에 ‘자정 순국’만 나온다.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자정 순국 투쟁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데 분노하여 스스로 생명을 끊음으로써 시작되었다. 을사조약을 전후해 이한응 · 민영환 · 조병세 · 김봉학 · 이상철 · 홍만식 · 송병선 등이 자결하였다. 1907년 고종의 폐위와 군대 해산을 맞아 또 이규응 · 박승환 · 김순흠 지사가 자결했다.
일제침략에 항거해 자정의 길을 선택한 지사는 1910년 이전 10명, 1910년대 56명에 이른다. 1910년대 자정 순국 지사들을 성명의 가나다 순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지면상 모든 분들의 공적을 소개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므로,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참조하시기를 바랄 뿐이다.
공치봉(孔致鳳) · 권용하(權龍河) · 김근배(金根培) · 김기순(金奇純)·김도현(金道鉉) · 김상태(金尙台) · 김석진(金奭鎭) · 김성진(金聲振)·김영상(金永相) · 김영세(金永世) · 김용구(金容球) · 김제환(金濟煥)·김지수(金志洙, 논산) · 김지수(金志洙, 연산) · 김천술(金天述)·김택진(金澤鎭) · 노병대(盧炳大) · 문태서(文泰瑞) · 박능일(朴能一)·박병하(朴炳夏) · 박세화(朴世和) · 반하경(潘夏慶) · 백성흠(白成欽)·백인수(白麟洙) · 송병순(宋秉珣) · 송완명(宋完明) · 송익면(宋益勉)·송주면(宋宙勉) · 오강표(吳剛杓) · 유도발(柳道發) · 유병헌(劉秉憲)·유신영(柳臣榮) · 이근주(李根周) · 이만도(李晩燾) · 이면주(李冕宙)·이명우(李命宇) 부부 · 이범진(李範晋) · 이보철(李普喆)·이승칠(李承七) · 이재윤(李載允) · 이중언(李中彦) · 이학순(李學純)·이현섭(李鉉燮) · 장기석(張基錫) · 장태수(張泰秀) · 정재건(鄭在健)·정동식(鄭東植) · 조장하(趙章夏) · 최세윤(崔世胤) · 최우순(崔宇淳)·홍범식(洪範植) · 황석(黃碩) · 황현(黃玹)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식을 고취한 교사
홍승무 지사 자정 순국으로부터 정확하게 57년 뒤인 1991년 10월 14일, 홍 지사와 같은 고향의 윤기석(尹基錫) 지사가 타계했다.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 652번에서 1909년 2월 6일 출생했으니 향년 82세였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의 독립운동의식을 고취한 죄(?)로 투옥과 고문을 겪었다.
윤 지사는 22세인 1931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부터 경북 의성군 의성공립보통학교 훈도(요즘 표현으로 ‘교사’)로 재직했다. 그는 교사로 부임하고 한 달 지난 5월부터 5·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노력하여 일제에 대항해야 한다”
늘 입버릇처럼 “조선은 현재 일본인의 압박을 받고 있으므로 학생들이 노력하여 이에 대항해야 한다”, “조선의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 등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발언으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독려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말도 있지만, 그는 교사 생활 겨우 26개월 만에 교단에서 쫓겨났다.
의성경찰서는 1933년 6월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를 체포했다.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된 지사는 석 달 동안 미결수로서 악랄한 고문을 당한 끝에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윤 지사 졸업 이듬해에 박정희 대구사범 입학
윤 지사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박정희가 그 학교에 입학했다. 윤 지사가 독립운동사상을 학생들에게 고취하다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피체된 1933년에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2학년이었다.
박정희의 대구사범 입학동기생들은 90명 중 무려 27명이 퇴학을 당했을 만큼(최상천, <알몸 박정희>) 항일의식이 강했다. 당연히 그들은 초임 교사인 윤기석 선배가 유치장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그때 박정희는 어떤 표정을 지었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