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아시아 여성 문인 최초이자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의 문학세계를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이라 평가했다.

우리나라 어떤 신문은 10월 12일 칼럼을 통해 “‘5·18’ ‘4·3’을 피해자가 섰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시선에 불편해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여론주도층의 그같은 공식 발언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 결과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역사 왜곡” , ‘채식주의자’를 “도덕 문란”으로 폄훼하는 인식이 유포된다. 정부기관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경기도교육청까지 나서서 한강 작가의 소설에 ‘난도질’을 했으니 일부 일반 국민이 그러는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5·18’, ‘4·3’만이 아니라 ‘독립운동’도 불편하다

‘5·18’, ‘4·3’만이 아니라 ‘독립운동’도 말만 꺼내면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해 말하고 있으므로 문학에 한정해서 예를 들면, 이광수·김동인·서정주 등 허다한 반민족행위 문인들의 작품은 “순수해서 좋고”, 현진건·이상화·이육사 등 대한민국정부 인정 독립유공자들의 글은 “저항적이라서 싫다”고 한다.

반민족행위자들의 시나 소설을 새삼스레 또 읽는 일은 힘에 겨우므로 언급을 생략할까 한다. 앞에 인용한 모 신문의 간부도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읽다가 “숨이 멎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 수준인가 싶어 자책이 된다.

민족문학가 이야기를 하면 “불편”한 분들을 위해 독립유공 문인 몇 분을 소개 드린다. 출생연도 순으로 한용운·현진건·이상화·심훈·주요섭·이육사·김광섭·윤동주 등이다. 반민족행위 문인들은 많고 독립운동을 한 문인들은 몇 분 안 되는지, 떠오르는 면면이 얼마 안 된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만해 한용운

한용운(韓龍雲)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의 한 분이다. 1894년 동학혁명에 참가한 이력이 있고, 그 후 한때 만주 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는데, 1905년 강원도 인제의 백담사에 들어 승려가 됨으로써 ‘불교인’으로 역사에 각인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사태가 일어나자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를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6년 서울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해 민중계몽운동에 힘쓰는 한편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2월 24일,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만나 독립운동 방안에 관해 협의했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 등 문서들의 초안을 검토했다. 이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는 초안을 ‘독립선언서’로 바꾸게 만들었다.

민족대표 33인에 해인사 승려 백용성이 불교계 대표로 동참하게 만들었고,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해 인사말을 하였다. 결국 한용운은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소에서 징역 3년을 살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문학 분야 공헌으로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발간으로 저항문학의 지평을 넓힌 일이 대표적이다. 문화운동 분야에서는 1931년 월간지 <불교>를 인수해 불교 대중화와 항일독립사상 고취에 힘쓴 일을 들 수 있다.

일장기 말소 의거를 일으킨 민족문학가 현진건

현진건(玄鎭健)의 직접적 독립운동은 1936년 8월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시 일으킨 ‘일장기 말소 의거’가 대표적이다. 손기정 선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 신기록으로 세계를 제패했을 때, 사진에서 일본 국기를 삭제하고 게재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얼렸다. 이 일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그의 또 다른 공로는 〈운수 좋은 날〉 등 우수한 민족문학 작품을 다수 발표하여 독립운동사상을 널리 전파한 데 있다. 당대의 대표급 소설가였던 그의 문학활동을 총독부는 눈엣가시로 여겼고, 마침내 창작집 <조선의 얼굴>에는 판매금지, 동아일보에 게재되고 있던 장편소설 〈흑치상지〉에는 연재 중지 조치가 취해졌다.

〈빼앗긴 들에도 본은 오는가〉의 이상화

이상화(李相和)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이다. 그를 설명하기 위해 ‘ㄱ당’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른 사실 등을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된다. 김상기 저서 <윤봉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의열독립운동의 상징 윤봉길 의사는 이 시를 읽고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했다.

심훈(본명 심대섭)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34년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가 민족적 현실에 참여하여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 〈상록수〉는 “당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크게 각성시킨 것은 물론 현재까지도 시대를 초월하여 불멸의 민족작품으로 남아 있다(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뿐만 아니라 그의 시 〈그날이 오면〉은 “그가 얼마나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고 이를 위해 분투하였는지를 가슴깊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공훈록). 〈그날이 오면〉에는 “〈상록수〉에서 보여준 계몽의식을 구체화하는 데 기여하였던 저항의식이 더욱 강하게 시적으로 변모되어 나타났고 (중략) 저자는 저항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모두 2연으로 된 시 전문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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