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0월 20일 채섬환(蔡暹奐) 지사가 타계했다. 1874년 10월 3일 경북 상주 이안면 여물리 423번지에서 출생했으니 향년 70세였다. 구한말 이강년 의병군의 일원으로 일본 군대와 싸웠고, 순국한 의병 동료들의 유족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

채 지사는 1907년 이강년 의병장이 재창의할 때부터 항일 전쟁에 참여했다. ‘재창의’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이강년 의병장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896년 을미의병 시기에 이미 군사를 일으켜 구국 활동을 펼친 바 있기 때문이다.

이강년 의병군의 일원으로 구국운동

이강년 의진(義陣, 의병 군부대)에 투신한 채 지사는 참모 한태섭·종사 이승재 등과 함께 창의 격문을 배포하고, 문경·봉화·단양·강원도 등지에서 후군장 신태식과 운량도감 신상희, 화약도감 신명교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군수물자를 조달했다.

이강년 의진은 “지역의 지리에 밝고 (중략)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세력(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었다. 하지만 1908년 이강년 의병장이 끝내 순국하는 비운을 맞았다.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 세력”

채 지사는 이강년 의병장 순국 후에도 한양이·이승재 등과 함께 김상태 중군장을 도와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의병군이 “정규군으로서 중화기로 무장한” 일본 군대에 맞서 “대적하기란 용이하지 않(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은 일이었다. 그것도 이강년 의진의 잔여 부대로서는 더 더욱 군대 규모와 무기의 질과 양에서 일본 정규군에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상태·한양이 등이 피체되면서 이강년 의진은 해체되고 말았다. 천행으로 목숨을 유지한 채 지사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제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이강년 의진의 좌종사로서 항일 전투에 참가했다는 증거도 자백도 없었으므로 그는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채 지사는 양파정(兩坡亭)에 서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일제 경찰의 위협과 감시 속에서도 이강년 의병장 유족을 돌보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1944년 10월 20일 나라의 독립을 못 본 채 세상을 떠났다.

구한말 우리나라 의병사를 돌이켜보면

구한말 의병은 크게 1894년부터 1896년까지 전개된 전기 의병과, 1905년부터 1910년경까지 전개된 후기 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 의병 중 갑오의병은 갑오변란(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서상철의 안동의병, 김원교의 상원의병 등이 대표적이다.

전기 의병 중 을미의병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1895년 12월 11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났다. 대구 출신 문석봉의 충남 유성 창의가 시초였고, 경북 의성 출신 김하락의 이천의진이 뒤를 이었다. 이소응의 춘천의진, 용호의 강릉의진, 유인석의 제천의진, 김복한의 홍주의진, 권세연의 안동의진 등도 활발히 활동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전후해 국권 침탈이 노골화되자 다시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1905년 원용팔의 원주의진과 정운경의 단양의진을 시작으로 1906년 정용기의 산남의진, 신돌석의 영릉의진, 민종식의 홍주의진 등이 창의되었다.

1894-1896년 전기 의병, 1905-1910년 후기 의병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태가 일어났다. “후기의병에서는 의병전쟁이 더욱 활기를 띄었”는데 “해산 군인이 참전한” 덕분이었다(신편한국사). 이강년의 제천의진, 민긍호 부대, 허위 부대, 산남의진, 신돌석 부대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의병 부대였다.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1908년 2월 작전은 좌절되었고, 거사에 참여하였던 의병 부대들은 각각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1908년 10월 허위 의병장이 서대문형무소에서 1호 사형수로 순국했지만, “(후기의병 때) 전국이 의병전쟁의 격전장이 되었던 점은 곧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예고하는 현상이었다(신편한국사).”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려면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