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일제는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제의 근거지였던 만주 지역에서는 동북항일연군 등 일제에 맞선 독립군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요.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열차나 헌병 부대를 습격하는 등 전투를 이어갔고요. 독립 의지를 알리고 보급을 해결하기 위해 선전 활동에 주력하는 등 최선을 다해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독립군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는데요. 이들을 확실하게 ‘토벌’하여 후방을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만주를 지배하던 일제는 이른바 ‘오족협화’ 이념을 내세우고 있었는데요. ‘조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야마토족 등 5개 민족이 협력하고 화합하여 서방 제국주의를 막아내고 아시아인의 번영을 이루자’는 정치 구호였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자기들의 침략 전쟁에 다른 민족까지 총알받이로 동원할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1937년 6월에는 만주 내 러시아인들로 이루어진 ‘아사노(浅野)부대’, 1939년 신장 방면의 회교부대, 1941년 몽골인 기병대원들로 이루어진 ‘이소노(磯野)부대’와 퉁구스족 사냥꾼들로 이루어진 ‘오로촌(鄂倫春)부대’가 각각 창설됐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1938년 9월 조선인들로 만들어진 부대 바로 ‘간도특설대’였습니다. 당시 간도성 성장을 맡고 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범익이 건의해 부대가 만들어지게 됐는데요. 안도현치안대, 훈춘국경감시대, 연길현청년훈련소, 봉천만군군관학교 및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대원을 선발했고, 위관급 이상의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인 위관 9명, 조선인 하사관 9명으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부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만주 전 지역에 대대적인 선전 홍보를 했는데요. 조선인 청년들의 자발적인 지원을 유도했습니다. 지원자격으로는 ‘첫째, 20세 미만 간도성 내 거주 한인 남자로서 신체 건강하고 품행 방정한 자. 둘째, 보통학교 졸업 정도 이상 학력을 가지고 일본어 독해 가능한 자. 셋째, 보증인 2명 이상으로 전과가 없고 군경 근무 경력이 없는 자’ 등이었습니다.

또한 부대 창설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조선인들에게 위문금을 걷어가기도 했는데요. 만주에 살던 조선인들이 부대 창설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수금 실적이 좋지 않아서 할당과 수금을 독려했고, 친일파들을 앞세워 학교, 종교 시설과 사회 단체에서 위문금 모금과 입대 지원을 밀어붙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인 청년들을 유혹하기 위한 당근도 제시했는데요. 만주군 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을 내걸기도 했습니다. 대학 수준의 고등 교육 제공과 능력에 따라 군관으로서 승진과 출세를 보장한 것인데요. 이런 신분 상승 유혹에 현혹된 조선인 청년들이 간도특설대에 자원 입대합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12월 1기 200명을 시작으로 1940년 3월 2기 100명, 1941년 6월 3기 80명 등 이후 매년 80명씩 인원을 선발했습니다. 1945년 4월 1일 7기 선발을 마지막으로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고, 전체 690여 명의 조선인이 복무했습니다. 퇴역이나 전직 등이 이유로 평상시 부대 인원은 300명 정도였습니다.

간도특설대의 역사가 기록돼 있는 <만주국군지>에 따르면 이들의 군사적 실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사격과 총검술은 간도성이 속한 만주국군 제6관구와 전군대회에서 항상 우승’을 했으며, ‘야간 기동은 부대가 부락 부근을 통과해도 그 촌락의 개가 짖지 않을 정도’였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놨습니다.

이들은 정신적으로도 완전한 일본군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요.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한 백선엽의 회고록에 따르면 “어느 날 밤 보초가 근무 중 졸았다가 이 사실을 당직사관에게 지적받자, 그를 지도할 책임이 있던 위병장이 다음날 아침 권총으로 자결하였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완전하게 일본 군국주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부대가에는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야마토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라며 일본 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간도특설대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을지는 모르나, 그들은 우리 독립 운동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간도특설대가 부여받은 주된 임무는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그를 위한 정보활동이었습니다. 이들은 농민으로 변장한 채 조선인 마을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고 민심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과 보복을 병행했으며, 특히 여성에 대한 만행은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1944년 2월 간도특설대 김송 중위는 한 소대를 거느리고 이영자(李營子)에 와서 독립군과의 관계를 캐물었고, 그곳 담당자 고준산을 살해했습니다. 유수림자(楡樹林子)의 조선인 김동근 역시 독립군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물고문으로 살해했습니다.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손요종, 손국동, 조청산을 권총으로 살해했고, 사람을 칼로 베어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1월까지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마을을 봉쇄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습격했는데요. 이 과정에서 피난가는 조선인 피난민들을 추격해 학살을 감행합니다. 간도특설대 상등병 이풍근은 마을 주민 이회정을 총살했고, 진상춘을 구타하고 우물에 처넣어 죽였습니다. 석갑진(石匣鎭) 동북쪽 동장화(東庄禾)를 토벌할 때 피난가는 조선인을 향해 사격해서 학살했고,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노인을 취조하던 중 구타해서 죽이고, 마을에서 식량도 탈취해 갔습니다. 간도특설대의 만행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독립군을 붙잡고 투항하지 않으면 모진 고문을 가했습니다. 가죽띠로 구타해서 살해하고 고춧가루 푼 물을 부어 고문했습니다. 여성은 성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간도특설대 중사 김헌삼, 오경수, 최홍준은 함께 한 여성을 윤간했고, 남편을 살해했습니다.

또한 간도특설대는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 불바다로 만들고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조선인들이 모이거나, 독립군이 마을에 숨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1945년 3월 사집진(司集鎭)의 북쪽에 있는 임육장(任六庄) 마을의 집 10채를 소각했습니다. 간도특설대원 김남룡이 전투 중 사망하자 보복행위로 마을 전체를 소각해서 없애버렸습니다. 마을에 독립군이 숨어있었다는 이유로 영각장(榮各庄) 마을도 불질렀고 집 64채가 전소됐습니다.

간도특설대는 그 잔혹성으로 더 악명 높았습니다. 교전 중 사망한 독립군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내 통조림통에 담았고, 독립군의 머리를 칼로 베고 시신 옆에서 목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이들은 심양으로 도망간 후 해산했는데요. 일부는 중국에 그대로 거주하였지만 나머지는 한반도 이남으로 돌아와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세탁했습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돼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간도특설대 김석범이 편찬한 <만주국군지>에는 “우리들 만주군인 출신은 일제탄압 하에서 조국 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한 혈맹의 동지들이다. 우리는 타향인 만주에서 철석같은 정신과 신념 밑에서 철석같은 훈련을 거듭하며 8.15광복을 맞이했다. 건국 건군 40년이 된 오늘날 50여 명의 장성급과 다수의 영관급 고급장교가 배출돼 조국의 독립과 자유 수호에 공헌했다”라며 자신들이 만주에서 독립정신을 연마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전현충원에는 총 8명의 간도특설대 출신자가 묻혀 있습니다. 해병대 3대 사령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금성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김대식이 장군1묘역 92호에 있습니다. 육군공병학교 교장과 국방부 시설국장을 거치고,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은 김묵은 장군1묘역 170호에 있습니다.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김석범은 장군1묘역 71호에 있습니다. 송석하는 여순항쟁 당시 여수지구계엄사령관으로 여수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지휘 책임을 갖게 됐고, 훗날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까지 맡습니다. 그 역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장군1묘역 93호에 있습니다.

해병대 초대 사령관을 맡은 신현준은 태극무공훈장을 3회나 받았는데, 그 역시 장군1묘역 273호에 묻혔습니다. 장군1묘역 45호 윤수현은 국방경비대 창군요원이었고 을지무공훈장 수훈자입니다. 보병 12사단과 5사단 사단장을 거쳐 강원도지사와 철도청장까지 지낸 이용은 장군2묘역 61호에 있습니다.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에 오른 백선엽 역시 간도특설대이며 장군2묘역 555호에 누워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 기준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단순하게 일본군 경력이 있다고 해서 다 등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간도특설대는 유달리 독립군과 조선인을 잔혹하게 학살했기 때문에 소속 부대원 전원이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습니다. 만주의 ‘동양귀’로 불리었던 이들이 애국지사 곁에 누워 국가의 영예를 누리는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