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7시 7만5000톤(t) 규모의 크루즈선 ‘노르웨지안 스피릿’이 인천항에 들어섰다. 세계 크루즈 운항사 ‘톱 5’로 꼽히는 노르웨지안 크루즈라인이 운항하는 이 배는 승객 규모가 1972명, 길이는 268m에 이른다. 항해할 때 배가 물에 잠기는 부분이 깊이 7m다.
노르웨지안 스피릿 호는 이달 초 요코하마에서 출발해 일본 내 항구 도시들을 거쳐 11일 제주, 이날 인천에 닿았다. 코로나19 완화와 다국 여행의 트렌드가 ‘한국→중국’에서 ‘한국→일본’으로 바뀌면서 이런 노선이 늘고 있다고 한다. 부자들의 여행으로 통하는 만큼 씀씀이도 쏠쏠하다. 지난해 BC카드는 크루즈선 입항일이면 해당 지역 상권 매출이 최대 30% 증가한다는 분석을 내기도 했다. 국제크루즈선협회(CLIA)에 따르면 세계 크루즈 관광객은 지난해 3170만 명으로, 코로나19 이전 최고치였던 2019년(2970만 명) 수준을 넘어섰다. CLIA는 올해 3470 명, 2027년엔 3970만 명이 크루즈선에 탑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렇게 국내 항구를 드나드는 크루즈선이 늘면서 관광·항만 업계에 화색이 돌지만, 이를 바라보는 조선 업계는 착잡하기만 하다. ‘메이드 인 코리아’ 크루즈선의 비율이 0%에 가까워서다. 크루즈선은 한 척 가격이 7000억~1조원에 이르는 고부가 사업이지만, 국내 주류 조선사들이 맡은 일감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유럽 4개국 조선사가 89% 장악크루즈선 건조는 이탈리아 조선사 ‘핀칸티에리’가 선두다. 시장 점유율이 45.7%로 절반에 가깝다. 이어 독일·프랑스·핀란드 선사가 43%를 나눠서 차지하고 있다. 국내 조선 업계는 한 척에 2000억~3000억원인 컨테이너선·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분야에선 수주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전 세계에서 연간 20척씩 신규 발주되는 크루즈선 건조엔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K-조선 업체들이 말하는 가장 높은 장벽은 사업 경험이다. 심상진 한국크루즈포럼 부회장은 “지금 만약 다른 신생 기업이 ‘삼성전자처럼 반도체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면 일감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경험이 없으면 시장에 뛰어들기 어렵듯, 크루즈선 건조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000년대 현대아산 금강산사업소 총소장을 지내며 여객선 운항 업무를 경험한 심 부회장은 “크루즈선은 ‘바다 위 호텔’의 안락함을 유지하기 위해 운항 중 진동을 최소화하고, 기둥 간격을 넓게 해 공연 조망이 쉽게 하는 등 기술 난도가 있다”며 “한국이 조선 선진국이라고 해서 당장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고 덧붙였다. 현대아산이 금강산 관광 사업 당시 현대중공업(현 HD현대)에 크루즈선 건조를 맡기지 않고 노르웨이산을 쓴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는 사이 글로벌 크루즈선 건조 시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세계 크루즈선사들은 국제해사기구(IMO) 규제에 따라 선박 유해물질 배출량을 2030년까지 2008년 수준의 60%로 줄여야 한다. 카니발 코퍼레이션, MSC 크루즈 같은 선두권 운영 업체는 “2050년까지 유해물질 배출을 제로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주요 선사들은 LNG 등 친환경 연료 추진 크루즈선 신규 발주를 늘리고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전 세계 크루즈선이 모두 친환경 연료 추진선으로 대체된다면 그 수요는 454척에 이른다(영국 전문매체 ‘크루즈하이브’ 집계). 신규 발주 물량을 더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척당 건조 가격이 1조원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은 450조원 시장을 눈 뜨고 지켜봐야만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황진회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부연구위원은 “조 단위로 돈이 드는 크루즈 조선업에 대해 ‘기업 스스로 사업성을 판단해 투자하라’는 건 사실상 하지 말라는 얘기”라며 “유럽·일본·호주처럼 정책 금융기관이 후순위 회수 투자금을 크루즈선 건조에 대는 등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위원은 “현재 경쟁력을 갖춘 LNG운반선 건조도 과거 정부가 자금 지원과 사업 독려를 통해 시작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가 수주 이미지였던 중국 조선업은 직접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크루즈선 분야에서 한국을 앞서가고 있다. 자국 선사에 크루즈선 매입 보조금으로 척당 최대 1억 위안(약 185억원)을 지급하는 정부 정책에 힘입어서다. 중국은 지난해 초 13만5000t급 크루즈선을 건조한 바 있다. 내년엔 비슷한 규모의 크루즈선 건조를 추가 착수할 예정이다.
국내 업체들도 시장 진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해운사 팬스타그룹은 지난 10일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크루즈선 ‘팬스타 미라클’ 진수식을 열었다. 건조는 지역 업체인 대선조선이 맡았다. 팬스타그룹은 내부 인테리어 공사와 시운전을 한 뒤 내년 3월 본격 영업에 나설 예정이다.
이 크루즈선은 2만2000t으로 노르웨지아 스피릿의 3분의 1 크기지만, 업계는 산업 진전과 노하우 축적에 의미를 두고 있다. 또 2만t 이상 크루즈선은 선사가 정부에 카지노 설치를 신청할 수 있는 요건도 갖는다. 황 위원은 “외국 선박을 빌리거나 소규모 크루즈를 운항하는 방식으로는 관광객 증가, 고용 창출 등 경제적 파급 효과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정부·지방자치단체가 먼저 크루즈 조선 핵심 기술 개발에 관심을 갖고 민간 기업과의 공동추진을 시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