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은 10월27일 총선에서 집권 자민당에 패배를 안겨주는 ‘황금 선택’을 했다. 만년 여당인 자민당에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입헌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에는 집권의 희망을 주었다. 전체 465석 중 자민당 191석과 연립정당인 공명당의 24석을 합해 여당이 215석을 차지한 반면 야당은 입헌민주당 148석을 비롯해 250석을 얻었다.
과반 획득에 실패한 자민당은 여당 의석으로만 자민당 후보의 총리를 선출할 수 없게 되었다. 야당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론적으로는 야당이 일치단결하면 야당에서 총리가 선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야당의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고려할 때 희박하다는 게 중론이다.
이에 일본에서는 결국 이시바 현 총리가 차기 총리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대세다. 오히려 문제는 총리 지명 이후다. 차기 총리로 선출되더라도 이시바 총리가 헤쳐 나갈 길이 매우 험난하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 패배의 주요인은 자민당의 불법 정치자금과 물가 문제였다.
자민당은 정치자금 불법 운영에 대해서는 문제가 된 의원들을 공천하지 않으며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끝내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특히 선거 막판 자민당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후보들에게 총선 후 당세 확장 차원에서 2000만 엔의 활동비를 지원한 게 드러나 유권자들의 분노를 샀다. 자민당은 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에게 등록비 500만 엔과 선거활동비 명목으로 1500만 엔, 도합 2000만 엔을 지급한다. 하지만 당과 무관한 후보에게 동일한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아직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난 속에 투표 직전 상당한 표가 이탈했다.
점점 커져가는 물가 문제 해결도 간단치 않다. 지난 30년간 디플레이션에 익숙한 국민은 최근 물가 급등으로 생활고를 호소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크게 약진한 국민민주당은 선거 핵심 주장으로 소득세 비과세 상한 인상 등 국민의 실질소득 향상과 민생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성공했다.
정국 운영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이시바 총리의 당내 입지가 약하다는 점이다. 자민당은 아직도 구 아베파, 현 아소파, 구 모테기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불법 정치자금 문제로 아소파 이외의 파벌은 해체되었다. 향후 이시바 총리의 정국 운영에 문제점이 노출된다면 자민당 내부에서 바로 불만이 표출되고 대안을 세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다.
다수 의석을 확보한 범야당이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할 수 있다는 점도 총리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원인이다. 그렇게 이시바 총리의 정치 능력은 시험대에 올랐다. 야당과의 관계 설정에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그간 자민당은 국회 운영을 주도적으로 해왔다. 주요 정책에 대해 국회 토론을 거치지만 다수당인 자민당이 늘 자신들 뜻대로 통과시켜 왔다.
그간 자민당 내 주요 파벌이 정책으로 결정하면 국가의 주요 정책이 되는 구조가 자민당의 의사결정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는 더 이상 이런 방식을 쓸 수 없다. 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에 야당의 협력과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야당을 존중하고 국정 파트너로 삼아야 한다. 그간 파벌정치에 익숙한 자민당 의원들은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정국의 혼란이 예상되는 점이다.
하지만 새로운 정치를 기대할 수 있는 기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 국민이 지난 선거에서 ‘황금 분할’ 결과를 만들어준 이유다. 이시바 총리가 자민당 내 파벌 수장들이 주요 정책과 방향을 결정해 국정운영에 깊게 관여하던 지금까지 방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정치 지형도 변화하고 있다. 그간 일본의 정치는 지역, 노조, 이익단체 등 중간 단체가 정당을 조직적으로 지지하면서 안정시켜 왔다. 하지만 고령화, 개인화로 전통적인 조직들의 공동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자민당과 제1야당의 정당 지지율 차이는 2배 이상이었다. 1954년 자민당 창당 이래 지금까지 보수, 지방, 농촌은 전통적으로 자민당을 지지해 왔다.
하지만 그 철옹성도 조금씩 깨지고 있다. 지난 10월 총선 이전 4월에 있었던 보궐선거 3곳에서 자민당이 완패했다. 특히 전통적으로 자민당 텃밭인 시마네현 시마네 1구 선거조차도 야당에 패했다. ‘지방과 농촌은 자민당 지지’라는 등식이 점점 약화되고 있다. 과거와 같이 일방적으로 자민당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대가 바뀌고 있다.
또 국민이 자민당 의원들의 각종 정치적 스캔들 속에서도 자민당을 지지해온 이유 중 하나는 야당의 수권 능력 부족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국민의 의식에 변화 조짐이 보이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국민은 좌편향 정당의 수권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중도 성향 야당의 수권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고령화 소자녀의 인구구조도 일본 정치 지형 변화의 한 요인이다. 고령층은 전통적으로 자민당 지지 세력이었다. 하지만 고령층 지지자 수가 줄어들고 투표율이 예전 같지 않다. 자민당 지지자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TV를 보지 않고 SNS를 한다. 자신들이 투표해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는다. 여야 간 대화와 타협, 정책을 둘러싼 토론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당내 기반이 약한 이시바 총리로서는 당내 파벌정치보다는 이제 국민을 보며 새로운 정치를 할 수밖에 없고 이번이 기회다. 당내 기반이 약해 조기 강판을 예상하는 시선도 적지 않다. 기존의 자민당 정치 구조로는 맞는 얘기다. 하지만 여소야대를 만들어낸 국민의 준엄한 명령만을 바라본다면 당내 파벌정치에서 헤어나올 수도 있다.
약점이 강점이 될 수 있다. 개혁과 변화의 아이콘이 될 수도 있고 되어야 한다. 침체되어 가고 있는 지방 경제도 살려야 한다. 대기업과 주식시장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지방에 가보면 살기 힘들다는 목소리 일색이다. 물가 상승으로 인한 서민들의 분노를 달래고 실질임금을 인상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지난 70년 가까이 일본 정치는 자민당 중심의 정치였다. 파벌정치가 중심이었고 파벌의 수장이 구상하는 정책이 자민당의 정치로 실현되는 구조였다. 자민당이 과반수가 되지 못하고 파벌 출신이 아니며 당내 기반이 약한 리더가 총리가 된 현 상황에서 보면 이시바 총리의 정치적 운명은 위태롭다. 얼마나 버틸까 하는 우려도 상존한다. 하지만 국민의 의식과 정치 지형의 변화가 감지되는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국민만 바라보며 야당과 대화와 타협을 해가는 새로운 정치 모습을 국민은 원하고 있다. 다섯 번 도전해 총리에 오른 집념의 이시바 총리의 진가가 나타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