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태는 1989년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와 그에 대한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을 말한다.
 
1980년대 중국은 덩샤오핑의 지도 아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발전은 불균등하게 이루어지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동시에 정치적 자유의 부족과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성장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정치 개혁과 더 나은 개인의 자유를 요구했다.
 
1989년 4월 15일,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했다. 후야오방은 개혁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의 죽음은 많은 대학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베이징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 그를 추모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 추모 시위는 점차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었다.
 
천안문 광장에는 수십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정부의 부정부패와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시위대는 언론의 자유, 반부패, 정치 개혁 등을 외쳤다. 시위는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중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불만과 변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준다.
 
처음에는 중국 정부도 시위대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고 참가자가 늘어나자 정부는 점점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정부 내에서도 시위에 대한 대응을 두고 의견이 갈렸지만, 결국 강경 진압을 결정하게 된다. 이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의 권력 다툼과도 관련이 있었다.
 
1989년 6월 3일 밤부터 6월 4일 새벽 사이,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와 무장 병력을 동원해 천안문 광장을 강제 진압했다. 군대는 최루탄, 총기, 탱크 등을 사용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도 속출했다.
 
천안문 사태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이 사건 이후 중국 정부는 더욱 강경한 통제를 통해 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려 했으며,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처벌이 이어졌다. 
 
국제 사회는 중국 정부의 무력 진압을 강하게 비난했고 서방 국가들은 대중국 제재와 외교적 비난을 가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일시적으로 조정하거나 경제 제재를 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국제 사회에서 상당한 비난을 받았으며, 외교적 고립을 경험하게 되었다.
 
천안문 사태는 중국의 정치 개혁과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 이후 중국 정부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으며, 이를 위해 정치적 통제를 강화했다. 
 
오늘날까지도 천안문 사태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여전히 이 사건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고 있지만, 국제 사회와 일부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 일간지인 광명일보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 지하철은 지난 2일부터 5일까지, 즉 첫 열차부터 마지막 열차까지 1호선 팔통선의 천안문 동역 D출구를 임시로 폐쇄할 예정이다. 구체적인 폐쇄이유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6월 4일 천안문 사태 35주기를 맞이하여 발생할 수 있는 집회나 시위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하고 있다.

이같은 조치는 중국 본토가 아닌 홍콩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전날 한 남성이 홍콩에서 행위 예술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남성은 허공에 한자를 쓰고 있었으며, 그가 쓴 한자는 ‘8964’였다. 이는 1989년 6월 4일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를 의미하는 숫자이다.
 
경찰은 그를 체포한 후 조사를 진행했으며, 조사 끝에 그를 석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