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를 몰라도 킬링필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학살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1975년 4월, 폴포트(Pol Pot)가 이끄는 극좌 마르크스주의 운동인 크메르 루주(캄푸치아 공산당)는 게릴라전 끝에 캄보디아 정부를 전복한다. 국가명도 ‘민주 캄푸치아’로 바꾼 폴포트는 도시 문명을 거부하는 그의 농촌 유토피아적 사상을 현실에서 실행하며 모든 캄보디아인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캄보디아를 공산주의 사회로 철저히 전환하는 폴포트의 프로젝트는 교육, 의료, 종교와 같은 모든 ‘부르주아’를 국민의 적으로 삼고 지식인, 예술가, 교사, 의료인, 종교 지도자, 심지어 안경을 쓰는 사람들까지 처형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 죽였고 목을 자르거나 맷돌이나 망치로 찔러 죽였다. 어린이들은 부모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죽음과 공포의 땅으로 전락한 캄보디아 인구의 25~30%, 약 200만 명이 학살당했다.

대학살 박물관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원래 여자고등학교(Tuol Svay Prey High School)였는데 폴포트 집권후 제21 보안대 본부인 S-21(Security Prison 21)로 사용된 곳이다. 캄보디아 전역에서 가장 큰 수용소였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웃음이 넘쳐났던 이 고등학교는 전 정권 관계자들과 지식인들을 고문하는 끔찍한 감옥으로 탈바꿈한다. 오디오가이드 설명에 의하면 이곳에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수감됐는데, 이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12명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그저 견학지 정도로만 여겼던 연수단원들은 학교였던 곳이 끔찍한 고문과 학살의 장소로 변했다는데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들 청소년을 매일 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연수단 일행은 입구에서 나눠주는 오디어가이드를 귀에 꼽고 고문과 학살의 생생한 상황을 직접 마주했다. 오디오가이드는 15개국 언어로 서비스되는데 한국어 서비스도 있었다.

명색이 박물관인데 담장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었다. 학살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려는 의도 같았다. 건물은 A동부터 D동까지 총 4개 동인데 오디오가이드는 32개 항목을 설명 서비스했다. 건물 내부에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사진과 고문 기구를 전시하고 있었다.

잔인한 고문이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 사람들은 근처의 총엑 킬링필드(Cheung Ek Killing Field)로 옮겨져 집단 학살된 뒤 매장 당했다. 총액 킬링필드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유리로 된 위령탑이 세워졌는데 그 안에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쌓여 있다고 한다.

‘킬링필드’라는 말은 크메르 루주의 지옥같은 학살 정국에서 살아남은 캄보디아의 사진기자 디트 프란이 태국으로 탈출할 당시 거리에 쌓인 시체 더미와 유골 모습이 알려지며 만들어진 표현이라니 얼마나 많은 유골들이 거리에 굴러 다녔는지를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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