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의 환자가 넘어가는데 A라는 약을 쓰면 나아질 희망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의사 입장에서는 A라는 약을 쓸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

김석진 대한혈액학회 이사장(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은 15일 소공동 롯데호텔서울에서 열린 추계학술대회 기자간담회에서 “최근 혁신적인 신약들이 대거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급여화 지연으로 인해 환자들의 접근성이 제한되고 있다”며 안타까워 했다.

제한된 건강보험 재정을 감안할 때 수억 원에 달하는 최신 항암제를 모든 환자에게 보장하기는 어렵더라도, 판단 기준이 모호해 급여 혜택이 유명무실해져서야 되겠냐는 얘기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의료진들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무분별한 삭감 조치로 인한 폐해의 대표적인 사례로 ‘킴리아(티사젠렉류셀)’를 꼽았다. 킴리아는 글로벌 제약사 노바티스가 개발한 CAR(키메릭항원수용체)-T 세포치료제다. 재발·불응성인 25세 이하 B세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ALL) 환자와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DLBCL) 성인 환자의 치료에 쓰인다.

1회 투약으로 말기 ALL 환자 10명 중 8명, 말기 림프종 환자 10명 중 4명이 장기 생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일명 ‘원샷 치료제’다. 기존 항암제와 달리 정상세포는 그대로 두고 암세포만 공격해 ‘꿈의 항암제’라고도 불린다. 다만 환자의 혈액 속 T세포를 추출한 다음 조작을 거쳐 다시 넣어주는 맞춤형 방식으로 제조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이 4억6000만 원에 달했다.

킴리아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보건복지부에 생명과 직결된 신약이 건강보험에 신속하게 등재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견을 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2022년 4월 건보 적용 길이 열렸다. 1회에 5억 원을 호가하던 환자 부담금은 최대 598만 원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2년 여가 지난 지금 킴리아를 처방하는 일선 의료진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심평원의 급여 기준이 모호해 혜택을 볼 수 있는 환자가 극소수인 데다 뒤늦게 삭감 통보를 받고 곤란해지는 상황까지 벌어져서다.

김혜리 대한혈액학회 홍보이사(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교수)는 “킴리아는 3차 치료부터 보험 급여가 인정되는데 2차와 3차 인정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며 “2차 약제를 한 번 써보고 암이 진행되면 치료반응이 없다고 판단해 3차 약제로 넘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 2차 약제를 두 세번 써보고 3차 약제로 넘어가지 않았다며 삭감 통보를 해오는 식”이라고 말했다. 암이 진행하는 걸 보면서도 삭감이 두려워 다음 단계 치료를 늦춰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1회 투여 비용이 수억 원에 달하는 고가의 약제가 삭감 조치되면 병원 입장에서는 막심한 손해를 보게 된다”며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보려고 최선의 치료를 했는데 병원에 손해를 끼친 격이 되어버리니 현장 의사들이 느끼는 자괴감도 크다”고 토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정갈등이 장기화하면서 혈액암 환자들을 진료하는 의료진들의 어려움은 가중되고 있다. 백혈병, 림프종 같은 혈액암은 초응급 상황이 빈번해 암 중에서도 기피하는 분야다. 갈수록 선호도가 갈수록 낮아지던 와중에 올해 2월 의대 정원 확대 발표 이후 전공의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일손이 더욱 부족해졌다. 임호영 대한혈액학회 학술이사(전북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 환자들은 완치 비율이 높은 반면 발병 초기 뇌출혈 위험이 크다. 올해 들어 뇌출혈이 생긴 상태로 내원하는 환자들이 부쩍 늘었다”며 “조금만 일찍 전문의를 만났더라면 나아질 수 있는 병인데 진료 허들이 높아져 합병증이 생긴 채로 병원에 오는 환자들을 볼 때면 안타까움이 크다”고 말했다.

By 진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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