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 사는 40대 직장인 제시는 턱선을 매끄럽게 만들고 싶어 보툴리눔 톡신 시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쓴 보툴리눔은 잘 알려진 브랜드 제품이라 안심하고 6개월 간격으로 주사를 맞았다. 그런데 초기엔 만족스러웠지만, 3년여가 지나자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주사 용량을 늘려보고, 병원을 옮겨보고, 반년 정도 시술을 중단해 보기도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시는 보툴리눔 톡신 내성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7일(현지시간) 피부과, 성형외과, 면역학, 의료윤리 등 미용의료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신경독소의 윤리적 사용을 위한 에스테틱 위원회(ASCEND)’가 베트남 하노이에 모여 보툴리눔 톡신 내성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윤리적 활용을 촉구하는 합의안을 발표했다. 2022년 국제미용성형학회에서 시작된 ASCEND가 보툴리눔 관련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보툴리눔 톡신은 특정 세균(보툴리눔균)이 생성하는 독성물질(톡신)에서 추출한 단백질이다. 소량을 투여하면 근육을 이완시키는 작용을 해 미용 목적뿐 아니라 사시, 만성 편두통, 다한증, 뇌졸중, 뇌출혈 합병증, 요실금 등 다양한 병의 치료제로 쓰인다. 하지만 과다 투여할 경우 면역반응이 일어나 더 이상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내성)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호주 미용 성형 클리닉의 니브 코도프 박사는 “치료 목적으로 보툴리늄 활용도가 커지고 있는 만큼 내성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ASCEND가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9개국의 보툴리눔 톡신 소비자 2,58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81%가 내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2018년 69%, 2021년 79%에 이어 내성 의심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내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투여 용량을 늘리고, 시술 간격을 줄이고, 병원을 옮기는 등 임의로 효과를 높이려 한 소비자가 66%에 달했다. 이날 모인 전문가들은 이런 방법이 오히려 내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보툴리눔 톡신 제조사가 20여 곳이나 집중돼 있는 한국 시장은 특히 내성 문제에 취약하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박제영 압구정 오라클 피부과 대표원장은 “제조사 간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고도의 정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저렴한 제품들이 밀려 들어왔다”며 “불필요한 단백질이 많이 포함된 제품 사용이 누적되고 있는 한국에서 보툴리눔 내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진단했다.

보툴리눔 톡신은 약효를 내는 핵심 독소와 이를 둘러싼 복합 단백질로 구성되는데, 복합 단백질이 많을수록 내성 발생 확률이 높은 것으로 연구됐다. 복합 단백질을 최소화한 이른바 ‘순수 톡신’을 쓰면 내성 발생을 줄일 수 있지만, 그런 제품이 충분하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짚었다. 마이클 마틴 전 독일 기센대 면역학과 교수는 “순수 톡신으로 개선하려면 제조 공정을 바꾸고 새로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보다 마케팅 경쟁에 힘을 쏟는 게 제조사들로선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세계 시장에 나와 있는 순수 톡신 제품은 4개, 국내엔 2개다.

환자와 의료진의 인식 개선과 함께 내성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관심을 가질 필요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제안했다. 파시피코 칼데론 필리핀 세인트룩스 메디컬센터 의대 교수는 “순수 톡신의 강점을 알리는 데 정부의 협조가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는 한국위해관리협의회 산하에 ‘보툴리눔 톡신 안전사용 전문위원회’가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