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 가운데 국군이 승리한 전투로는 백마고지 전투가, 중국과의 논쟁 아닌 논쟁으로는 상감령 전투가 많이 알려진 것 같다. 상감령 전투는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우리 공간사에서는 유엔군이 쇼다운 작전으로 전개한 저격능선 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묶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저격능선과 삼각고지는 오성산(해발 1062m, 지금은 북한에 속한다)의 바로 남쪽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고지들이다. 오성산 앞의 두 고지 사이에는 남북으로 이어지는 고갯길이 있다. 북쪽은 상감령이고, 남쪽은 하감령이다. 중국은 그 지명을 따서 상감령 전투라고 부른다.

1952년 10월 이미 1년 이상 끌어온 휴전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다시 긴장이 높아지면서 백마고지와 상감령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두 개의 고지전은 지리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서로 결속돼 있어 하나의 짝으로 볼 수 있다.

1952년 10월 6일 중국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백마고지 전투가 끝나기 하루 전인 10월 14일, 상감령 곧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에서 동시에 유엔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중국군이 유엔군의 전초기지인 백마고지에 대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자,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전선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위해 중국군에 강력하게 맞서는 쇼다운 작전을 세웠다. 유엔군의 힘과 능력을 보여주겠다(Show down)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원에서는 백마고지를 방어하고, 금화에서는 삼각고지와 저격능선 두 곳에서 중국군의 좌측 옆구리를 공격한 것이다.

두 전투가 벌어진 전장은 동서로 직선 20여 km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도 백마고지 전투전적비와 저격능선 전투전적비가 비슷한 거리에 있다. 백마고지 전투전적비는 이미 잘 알려진 철원의 관광지다. 3번 국도에서 가깝고, 철원 노동당사에서도 멀지 않다. 경원선을 복원하면서 철원역 대신 민통선 남쪽에 새로 만들어진 역을 백마고지역으로 명명하면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43번 국도가 김화의 화강과 만나는 강변의 녹지에 저격능선 전투전적비가 있다. 쉬리캠핑장을 둘러싼 야산 초입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전망 좋은 곳에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백마고지 전투만큼이나 치열한 전투 끝에 국군이 승전한 현대사의 유적이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삼각고지 전투는 기념비는 아예 없고, 언론보도나 개인의 기록 또는 한국전쟁 관련 자료에서도 비중 있게 언급되지 않는다. 미군이 참패한 곳이라서 그럴까. 설마리의 영국군과도 사뭇 다르다.

두 개의 전투는 치열하다는 말이 송구스러울 정도로 치열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중국군이 총력을 기울여 선제공격을 해오고 국군 9사단이 결사적으로 방어했다. 열흘 동안 열두 번의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졌고 일곱 번이나 점령과 피탈을 반복한 끝에 방어해 낸 것이다. 중국군 사상자가 1만여 명이나 됐고 국군도 3500여 명의 인명피해를 당했다. 전장에 뿌려진 핏물이 바다를 이뤘다고 하면 이곳이 바로 혈해(血海)였을 것이다.

상감령 전투는 10월 14일 시작해서 11월까지 계속됐다. 삼각고지 전투가 11월 5일, 저격능선 전투가 24일 끝나면서 총 42일 동안 벌어졌다. 유엔군은 2개 사단을 동원하여 각 사단에서 1개 대대씩을 투입해 닷새면 작전을 끝낼 수 있다고 계산했다. 국군 2사단은 저격능선을, 미7사단은 삼각고지 능선을 공격했다. 그러나 1개 대대씩은커녕 두 개 사단의 전체 병력을 투입하고도 5일이 아니라 42일 동안이나,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치른 가장 큰 규모의 혈전을 벌어야 했다.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양측이 쏘아댄 포탄의 숫자만 보아도 실감이 난다. 백마고지에서는 열흘 동안 유엔군이 22만 발, 중국군이 5.5만 발, 양측이 총 27.5만 발을 그 좁은 고지에 쏘아댔다. 양측이 합쳐서 하루 평균 2만7500발을 퍼부었고 하루 평균 1400여 명의 장병들이 죽어 나갔다. 오죽하면 고지의 정상부가 폭격에 깎여 2미터나 낮아졌다는 말이 있을까.

상감령 전투에서는 유엔군은 190만 발, 중국군은 40여 만발, 총 230여 만 발을 쏟아부었다. 전투기간이 42일이었으니 하루에 5만 발이 넘는 포탄을 양측이 퍼부은 것이다. 포탄 한 발에 5만 원만 쳐도 총 1150억 원을 폭음과 시체와 핏물 속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숫자만 보아도 백마고지 전투보다 훨씬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자 역시 엄청났다. 어느 전쟁이든 아군의 전사자 통계는 비교적 신뢰할 수 있으나, 전과 곧 적군 사상자의 숫자는 과장과 왜곡이 끼어들 수 있다. 이런 오류를 감안하여 양측의 아군 피해자 집계만 찾아봤다. 내가 한국과 중국에서 확인한 상감령 전투의 사상자는 다음과 같다.

아군 피해와 적군의 전과 사이에 꽤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측이 주장하는 전과를 배제하고 아군 사상자 숫자만 보면 중국군이 1만1500여 명, 유엔군이 7000명에 가깝다. 중국군이 1.7배 정도다.

상감령 전투에 참전한 국군 장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전율이 일지 않을 수 없다. 한 초급장교는 병사 30명을 이끌고 생사를 넘나들며 고지를 점령했는데 생존한 병사가 7명뿐이었단다. 그때 옆의 중대를 보니 중대장 혼자만 살아남아 무전기로 대대 본부를 미친 듯이 호출하고 있었단다. 극렬한 전투 속에 중대장이 미쳐버린 것이다. 치열하고 처참하다는 말로 어찌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상자 숫자만으로 전투의 승패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상감령 전투의 경우 저격능선은 국군 2사단이 목표로 했던 세 개의 고지 가운데 두 개를 점령했으니 국군이 값진 승리를 거둔 것이다. 보수적으로 표현해도 3분의 2로 승리한 공격이다. 저격능선을 바라보는 화강 강변 경사지에 전투전적비를 세울 만하다.

삼각고지는 완전히 다르다. 미군은 참패했다. 미군 7사단은 1개 대대만 출동시키기는커녕 총력으로 사단 전체 병력을 투입했고, 23일 동안 무려 수십만 발의 포탄을 쏘아대면서 한국전쟁 최대 규모의 지상군 혈전을 벌였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일단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말하듯 인명피해가 엄청났다. 그러고도 작전지역 자체를 국군 2사단에게 넘기고 후방으로 빠졌다. 작전상 후퇴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전선에서 퇴출당한 셈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미국의 국내 여론이 급격히 나빠졌다. “한국전선에서 명분 없는 전쟁으로 미군이 쓰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군뿐 아니라 미국 정부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중국은 상감령 동쪽의 저격능선에서 두 개의 고지를 국군 2사단에게 빼앗겼지만, 서쪽의 삼각고지에서는 세계 최강의 미군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상대에게 군사적 타격을 주고 고지를 방어했을 뿐 아니라 적국의 여론을 악화시키기까지 한 것이다. 중국군이 미군을 상대로 승전한 전투는 많았다. 압록강에서 37도 선까지 일거에 밀어냈으니 도처에서 승전이었다. 그러나 삼각고지 전투는 그 규모나 전과로 볼 때 다른 단일전투에 비해 훨씬 두드러진다.

중국은 전후의 대내외 선전에서 삼각고지 전투 곧 상감령 전투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저격능선 전투는 빼고 상감령 전투의 삼각고지 전투만 부각시켜 <상감령> <영웅자녀(英雄儿女)> <침략자를 타격하다(打击侵略者)> 등 많은 전쟁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중국의 다양한 관영 민영 매체를 통해 지금까지도 수없이 방송하고 있다. 중국은 ‘기억의 전쟁’에서 21세기 유일의 패권국가 미국에게 승리했던 사례로 20세 중반의 상감령 전투를 수시로 소환하는 것이다.

영화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도 중국에서는 유명한 곡이다. 중국의 많은 행사에서 수없이 불리고 연주되면서 그들의 애국주의를 고양하고 있다. 심지어 2011년 1월 19일 후진타오 주석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인 피아니스트 랑랑을 불러 백악관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게 했는데 바로 이 곡이었다. 미군에게 승리한 전투를 기념해 만든 노골적인 반미영화의 주제음악을 다름 아닌 미국 백악관에서 연주했다니. 중국의 무례함과 미국의 무지함이 기묘하게 결합한 해프닝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들어 미국과 중국의 불화가 심해지면서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는 애국주의 교육 차원에서 이 상감령을 다시 거론한다는 뉴스도 종종 들린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승전 자랑에 저격능선의 승리를 덧붙여 중국의 국수적 주장을 희석하곤 한다. 어차피 전장의 전쟁이 훗날 정치적으로는 기억의 전쟁이 되는 게 다반사이니, 상감령 논란은 언제든 일어나는 일이지만, 사실을 축소하거나 선별하고, 일방적인 과장이 감동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이 두 개의 전투는 1952년 10월의 일이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앞의 글에 이어서 1951년 중국군의 5월 공세 이후의 한국전쟁이 어떻게 전개됐는가.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넌 이후 1951년 5월까지 다섯 차례의 공세로 유엔군을 북위 37도 선까지 밀어냈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유엔군의 반격 속에 전선은 다시 38도 선에서 멈추는 양상이 됐다.

북한 인민군은 자기 역량을 훌쩍 넘어 부산까지 점령하려다가 역습을 당해 빈사 상태에 몰렸고, 유엔군은 맥아더의 오만과 오판으로 전면적인 철수 직전까지 몰렸지만, 중국군은 자기 역량의 최대치까지만 공격하고는 더 이상의 무리한 공세를 하지 않았다. 영리했다고나 할까. 그 결과 38선 언저리에서 전선이 출렁일 뿐 더 이상의 중대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전선이 38선 일대에 고착된 이후의 전황을 군사편찬연구소의 공간사에서는 ‘휴전협상과 고지쟁탈전’이라는 말로 축약하고 있다. 한국전쟁 3년 가운데 2년이나 되는 긴 기간이다.

휴전 논의는 전선교착 이전부터 있었다. 1950년 12월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아랍 13개국이 양측에 휴전을 제안했다. 12월 초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애틀리 영국 수상이 만나 유럽의 안보이익을 우선하기 위해 동아시아에서의 전쟁은 확대하지 않고 한국전쟁은 38선에서 종결짓기로 했다. 미국은 내부적으로도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휴전을 고려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중국 역시 신생국가로서 무한정 전쟁에 빠져들 수 없었다.

38선에서 고착된 전황과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비슷하게 맞아가면서 전쟁은 이제 휴전협상 국면으로 넘어갔다. 1951년 7월 유엔군과 중국-인민군은 휴전회담을 시작했다. 회담이 며칠 만에 결렬되자 남측은 북측을 회담장으로 돌아오게 압박하기 위해 다시 격렬한 전투를 재개했다. 1951년 7~12월에 강원도 양구 지구를 중심으로 한, 소위 고지전들이다. 그 첫 번째 전투가 대우산 전투였다. 힘들게나마 고지를 점령했다. 회담을 속개시키기 위해 잠시 휴지기에 들어간 듯한 전투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이다.

대우산 전투에도 북측이 회담장에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포탄 30만 발을 쏘며 피의 능선 전투(1951년 8월)를 벌였다. 결국 상당한 피해를 입고 입히면서 고지를 점령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장면이 이 전투다. 펀치볼 전투(8월), 백석산 전투(8~10월), 가칠봉 전투(9~10월), 단장의 능선 전투(10월) 등이 같은 맥락에서 이어졌다. 하루 3만 발까지도 쏘아대는 포탄으로 능선과 고지에는 나무 한 그루 남지 않을 정도로 격렬했다.

그래도 휴전회담은 지지부진했다. 지금은 북의 영역인 어은산 가까운 곳까지 밀고 간 남측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지나서까지 격렬한 공중폭격, 지상포격, 육박전을 계속했다. 6개월 정도의 고지전을 치른 결과 남북의 대치 전선은 펀치볼 남측에서 펀치볼 북측까지 올라갔다. 회담이 지지부진한 동안 땅 따먹기가 된 셈이다. 한 뼘의 국토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라는 수사가 내 귀에 익숙하다.

이 기간의 전투에서 6만6000여 명이 전사했다. 대략 한 달에 1만 명씩, 하루에 300 명씩 전사했다. 지지부진한 휴전협상에 전선의 남북에 배치된 수만 명의 목숨을 갈아 넣었다. 남한의, 북한의, 미국의, 중국의, 프랑스와 그 외의 많은 국가에서 온 젊은 장병들을 무기고의 총탄과 다를 바 없이 기계적으로 전선에 밀어 넣은 것이다. 정치란 게 그렇고 전쟁이란 게 그렇다고 하기엔, 가슴이 먹먹하다.

이 기간의 전사자 가운데 유엔군 측이 1만2천이고, 중국군과 인민군이 5만4천이다. 북측이 남측보다 4배 가까이 더 죽었으니 승리한 전쟁일까. 북으로 12~15km 정도 진격했으니 성공인가. 무기와 장비에서 우월한 유엔군은 포탄을 쏴도 서너 배 많은 포탄을 쏘아댔다. 유엔군 측은 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훨씬 많은 물자를 쏟아부었고, 그보다 경제 사정이 형편없는 중국과 북한은 물자가 부족한 만큼 인명으로 그 갭을 메꾸고 있었다.

1951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전초 진지전 양상이었다. 이때 국군은 전방의 2개 사단을 후방으로 보내 지리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공군의 후방 차단작전도 계속됐다. 주로 철도 시설을 공습하여 1952년 3월부터 6월까지 1만 9천 개소의 철도를 파괴한 것으로 보고됐다.

이즈음 휴전협상의 난제는 북한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않는다는 유엔군의 요구였다. 재해권·제공권에서 압도적이었던 미군은 휴전 이후에 공군력을 증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북한 지역에 비행장을 건설하지 못한다는 의제를 제기하고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북측에서는 내정간섭이라며 강하게 거부했다. 중립국 감시위원회에 소련을 넣자는 북측의 요구도 걸림돌이었다.

포로교환은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될 것이라는 초기의 낙관론에도 불구하고 협상 후반에 난제 가운데 최악의 난제가 됐다. 한국전쟁의 포로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얼른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포로가 아니었다. 유엔군에게 포로가 됐으나 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상당수의 반공포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결국 1952년 10월 8일 유엔군 측이 무기휴회를 선언했다. 이로써 휴전협상은 15개월 만에 결렬됐고 그 이후 6개월 정도 휴회 상태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다시 고지전이 격화됐다. 평강 철원 금화 지역을 잇는 소위 철의 삼각지를 통제하기 위한 양측의 대대적인 공세가 벌어졌다. 중국군이 선제공격을 한 것이 백마고지 전투이고, 이를 받아치며 유엔군이 공격한 것이 상감령 전투다.

그러나 한국의 이승만을 제외한 전쟁 당사국들은 모두 조속한 휴전을 원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자국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이 깎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념, 민주, 정의, 자유, 해방 등의 선명한 어휘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